협회 김범준 이사 장애 극복상 수상 | |||||
최정남 | 2015-04-21 | 2,114 | |||
김범준 평원산업 대표 '경기도 장애극복상' 수상 (가평=국제뉴스) 장영광 기자 = 경기 가평군의 기업가인 김범준 평원산업 대표가 경기도 장애극복상을 수상했다. 시각장애 1급인 50세 김범준 평원산업 대표는 '제14회 경기도 장애극복상'에 선정돼 지난 20일 수원에서 열린 '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장애극복상 첫 번째 수상자로 단상에 올랐다. 이날 경기도지사 상패를 받은 김범준 대표는 장애로 인한 각종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가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장애인 인식개선 및 지역사회발전을 위해서는 어디든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 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01년 (사)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경기도지부 가평군지회 창립해 1·2대 회장을 맡이 시각장애인들의 복지향상에 큰 힘을 실었으며, 2006년부터 한국실명퇴치운동본부에서 이사로 활동하며 관련 질병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다. 또 장애를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장애인들과 동등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며, 2008년 가평군 지역발전위원회 위원, 2012년 가평경찰서 보안협력위원회 위원을 비롯해 2015년 청평포럼 위원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왔다. 아울러 "기업을 운영하며 얻은 이윤의 일부는 지역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경영철학 하에 매년 장애인단체를 후원해 왔으며, 저소득주민들의 집수리 사업을 위해 건축자재도 지원하고 있다. 게다가 앞이 보이지 않는 한계에도 절망하지 않고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틈틈이 배워 색소폰 동아리 '공존'에서 10여 년 간 활동해 왔으며, 사회복지시설 무료공연을 비롯해 각종 행사의 공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편, 현재 가평군 기업인회장도 역임하고 있는 김 대표는 1984년 중동화물을 시작으로 성실한 운영을 통해 사세를 확장, 1990년부터는 콘크리트 등의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평원산업과 각종 철물 자재를 유통하고 있는 서울철물을 경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수상소감에서 "이런 의미 깊은 상을 받게 돼 감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행동을 더 조심스럽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앞으로 장애인들이 사회 안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장애인 인식개선 및 자립을 위해 함께 노력해 가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 김범준 평원산업 대표 "나는 이겨냈다라기 보다는 계속 이겨내는 중이다"라고 가감 없이 말하는 김범준 평원산업 대표. 시각장애 1급인 그는 초등학교 시절 눈이 심각하게 나빠진 난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고3때부터는 양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사업 그리고 지역사회 및 각종 장애인단체 활동에서 비장애인 못지않은 넓은 활동력과 추진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체 없는 행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또 준비하고 있으며, 장애인은 더더욱 '사회'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지내야 한다고 충언한다. 장애인이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도 '함께'라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 언제부터 시각 장애가 있었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첫 진단을 받았다. 안과전문의도 사례를 만나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당연히 지금처럼 병명이 정의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연 듯 드러난 이 이름조차 모르는 병 때문에 10대 그 많던 꿈과 희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20대가 되어 사회에 나오면 조금 수월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매번 모험 아니면 살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30대를 겪고 40대가 되니 비로소 다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장애에도 오히려 다방면의 사회활동을 하시는데? 시각장애 1급이면, 혼자서는 보행이 어려운 상태라고 보면 된다. 30대 초반 이후 내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뭐가 제일 불편하냐고 물어본다면, 눈을 뜨고 있는 자체가 불편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치료는 내 노력과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만 기다릴 순 없다. 혼자 겪는 외로움과 괴로움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 가야 했다. 시각장애인도 매우 힘겹게 100m 정도는 혼자서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와 어울려 간다면 쉽게 더 멀리, 많은 곳을 갈 수 있다.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함께 어울려 지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 장애인 관련 단체를 위해서도 열심히 활동하시는데? 일반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으면 맹학교를 다니다 보니 외부와의 접촉이 넓지 않다. 또 직업도 한정적이었다. 다행히 내 경우에는 정상적인 학업이 힘든 상황이긴 했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그냥 일반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보건복지부 소속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가평지회를 2001년 창립, 초대 1?2대 회장을 맡아 열심히 일해 왔다. 지회의 첫 행사가 안산에서 열리는 '한마음 축제'였는데 당시 현리에 있는 한 회원이 34년 만에 첫 나들이였다고 해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때부터 '집 밖으로 나오기 운동'을 펼쳤고, 청평양수발전소의 도움으로 출입을 통제했던 호명호수를 매달 2번씩 산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주 만나다 보니 회원 간에 친목관계도 형성돼 서로 위안이 되기도 했다. 10년이 된 한국실명퇴치운동본부는 RP라는 난치병 회원들을 위한 단체다. 전국 6천여 명 정도의 회원이 있는데, 최근 이를 위한 연구단체가 결성됐고 회원들은 연구비를 전달하는 등 관련 질병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주고 있다. - 색소폰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 색소폰을 하게 된 계기는 2가지다. 첫 번째로 술자리를 줄여 취미생활을 하자는 취지였다. 매일 사람도 많이 만나고 바빠서 술자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같은 사람과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즉, 시간이 없어서 취미생활을 못했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취미생활 준비하게 됐는데, 시각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취미가 한계가 있고, 접근하기도 어렵다. 다행히 함께 해준 이가 있어 용기를 내 색소폰을 시작하게 됐다. 또 다른 이유는 노래를 못하는데, 악기로라도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이제 색소폰 연주는 삶을 한층 풍요롭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초기에는 2명으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9명까지 늘어난 '공존'팀은 이제 제법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매년 10회 가량의 공연을 한다. 지난해에는 '제1회 한여름밤의음악회'도 열어 큰 호응을 받았다. 올해는 '찾아가는 문화활동'와 가평군에서 5월말부터 진행하는 거리공연에도 함께 하게 돼 더 바쁜 일정을 보낼 것 같다. 공존팀은 시각장애인이 2명과 비장애인 7명이 서로 배려하며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 향후 목표가 있다면? 사업 하는 사람은 사업을 잘 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나도 마찬가지다. 활동의 폭이 좁다보니 사업에서도 어려움은 있다. 그러나 예전에 아버님이 운영하실 때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이르렀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앞으로도 책임성 있는 사람 그리고 기업의 대표로서 더 성실히 운영해갈 것이다. 공공기관에 부탁하고 싶은 점도 있다. 장애인을 일반인과 똑같은 상황에서 경쟁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불공정일 수 있다는 측면을 공공기관에서만큼은 꼭 인지해줬으면 좋겠다. 관급 분리발주 제도가 도입되면서 장애인기업에게 5점 가량의 가산점이 부여된다. 국가 차원에서 장애인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치다. 그러나 분리발주라는 시스템의 변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지, 아쉽게도 아직 우리 지역에서는 반영이 안 되고 있다. 이런 부분을 조금 개선해줬으면 좋겠다. - 비슷한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 한마디 남긴다면? 운신의 폭이 좁다고 그냥 그대로 있으면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려고 하면 조금씩 보인다. 내 경우에는 하려고 마음먹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지체 없이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가짐도 조절해야 했다. 요즘 '바우처 제도'를 통해 장애인들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부분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부분도 적극 활용해 현실 상황에 맞는 인생을 찾아 나서야 하고, 또 일을 해야 한다. 환경은 스스로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혼자 겪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사회 안에서 함께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