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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도시 송도는 1998년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밤 더 찬란했다, 마치 대기권 가까이 왔다가 가는 혜성을 위해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그 중 빨갛게 반짝반짝 깜빡이는 노래방 간판 아래 경계석 위에 나는 쭈그리고 앉아 있다. IMF 한파는 올해도 명예퇴직으로 이어졌다. 오늘도 갈매기집에서 송별회를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송별회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 나갔지만, 떠나보내는 자로서 미련이 남았던지 밀려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인지 몇몇은 어깨동무까지 하며 노래방으로 휩쓸렸다. 어쩌다보니 나도 입구까지 왔다. 겨울치곤 공기가 차갑지 않고 시원하다. 그래도 점점 취기가 올라온다. 좋아하는 사람이든 미워했던 사람이든 이별은 아직 쉽지가 않다. 나이가 들면 편해질까? 습관이 되면 괜찮을 수 있을까? 간판 불빛들이 술기운에 점점 번져가고 겹쳐졌다. 동해의 깊은 곳에서 후루시오 난류처럼 사람들이 몰려오고 오츠크해 한류처럼 일련의 다른 사람들이 몰려가다가 섞이고 다시 흘러 골목길은 번잡했다. 그래서 택시는 골목까지는 들어오지 않는다. 철없는 자가용만이 가끔 잘못 들어와 사람보다 느리게 걷고 있을 뿐이다. 속이 거북하다. 담배나 한 대 피고 큰 길로 나가 택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런데 멍청한 택시 한 대가 갑자기 앞에 나타났다. 놓칠 수 없어 세우려고 차를 막아 세웠다. 택시 앞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옆구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와 닿았다. 사람이 있었네 생각하며 얼른 뒷문으로 탔다. 물론 이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채야 했다. 알코올에 젖은 뇌는 집에 가는 한가지 명령에만 출산한 네비게이션에 불과했다.
“아저씨, 학익동 00화학 사원아파트요.”
얼마나 히터를 세게 틀었던지 차 안 공기를 훈훈함을 넘었다. 열기가 거푸 코 속으로 들어오니 몽롱함을 넘어 잠이 들고 말았다.
"이보세요. 일어나 봐요. 여기가 맞아요?“
얼마나 잤을까 흔들며 깨우는 손에 눈을 떴다. 두리번거리는 내게 재차 물었다.
“이봐요 여기 맞아요?”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하고 내리려고 문고리를 찾아 더듬었다. 그런 나를 보았는지 조수석에 탄 사람이 내려서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내 손에 지갑을 쥐어 준다. 택시비를 낸 것이려니 생각할 뿐 이상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 문까지 열어 준 것에 감사하여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걸었다. 보이는 불빛들은 모두 흔들리고 있다. 아파트입구 슈퍼 앞 둥근 비치 테이블에 둘러 앉은 일행이 아는 체를 했다. 상무님, 관리과장님을 일행 중에서 발견하고 넙죽 인사를 하니
“야 너 뭐 타고 오는 거야!”
입사 동기가 물었다.
“택시......”
대답하면서 뒤에서 방향을 바꾸려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택시를 손으로 가리켜 주었다.
“야! 뭐야!"
하며 동기가 웃었다. 전염성인 듯 앉아 있는 일행들이 모두 웃었다. 나는 왜 웃는지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계면쩍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독신자 숙소에 들어 왔다.
그 밤 내 잘못은 다음날 아침 회사 휴게실에서 알 게 되었다. 정신 차리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인사하는 내게 이화학실 차장님이 물었다.
“이대리, 어제 뭐 타고 왔어?”
무엇을 물으시는지 몰라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으니 난 네게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미소를 지으신다. 앉아 있는 일행들이 크고 작게 같이 웃었다. 무엇을 묻는지, 왜 웃는지를 아직 파악하지 못해서 멋쩍게 웃으며 그들 곁에 앉았다.
“너 어제 경찰차 타고 왔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설명을 구하듯 동기를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동기의 설명은 이랬다. 어제 슈퍼 앞에서 동기가 앉아 있는데 난데없는 경찰차가 들어 오길래 유심히 지켜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뜬금없이 내가 나왔다고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구에 불 들어오듯 이해가 확 되었다. 어젯밤 나는 경찰차를 택시로 오인해서 막무가내로 세우는 등 몽니를 부린 것이다. 직원들은 다들 내가 술이 과해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나는 야맹증이 있다 즉 밤눈이 어둡다. 밤에는 빛의 강도에 따라 사물의 식별이 가능하거나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밤에는 영어를 모르는 어르신들이 구분하시는 방법과 똑같이 낙타 혹처럼 차 등에 뿔이 난 것은 택시, 혹이 없는 것은 자가용으로 판별한다. 물론 경찰차도 혹이 있지만 혹의 크기가 택시의 것보다는 크고 너부대대 하기 때문에 가까이 오면 구별할 수 있지만 평상시에 경찰차를 볼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다.
어제는 아주 착하신 경찰 두 분을 만났던 것이다. 민중의 지팡이들께서 연말연시를 맞아 송도의 우범지역을 순찰하시던 중 갑자기 대취한 막돼먹은 시민이 순찰차를 온 몸으로 막아 세웠던 것이다. 게다다 막무가내로 집에 데려다 달라는 무경우를 당하신 것이다. 처음 겪으시는 일일 것이니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그래도 내게는 다행스럽게 급히 처리할 민원 업무가 특별히 없으셔서 천둥벌거숭이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시민이라 생각하시어 관할구역을 벗어난 곳임에도 주민등록증에서 주소를 확인하신 후 난동자의 자택 코앞까지 고이 바라다 주셨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볼수록 창피하고 죄송해서 고개를 절로 숙여저 들 수가 없고 경찰분들의 선행에 골백번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찾아갈 배짱도 없고 엄두를 낼 용기도 없지만.
그 날 나는 하루 종일 경찰차의 속된 표현인 빽차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입사 동기들은 복도 멀리서도 나만 보이면 신이 나서
“어이 빽차!” “오늘도 빽차 타고 출근했냐?” “또 빽차 타러 가냐?”
라며 세상이 다 알리기라도 할 양으로 크게 불러댔다. 마치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내가 그들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에게 다가가 꽃, 아니 빽차가 되는 양. 그래서 근무시간 내내 빽차는 누가 이름이라도 불러 줄까봐 어깨를 잔뜩 움츠리 다녔고 가능한 한 화장실도 자주 가기를 삼가는 조신한 남자가 되었다.
나는 망막색소변성증이란 시각 질환을 가지고 있다. 우리끼리는 줄여 RP라고 하는데 이 병은 우리 눈 중에 카메라의 필름격인 망막이 바깥 부분부터 세포가 서서히 변성, 기능을 상실한다. 이로 인해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가 종국에는 빛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실명 상태에 이fms다. 망막의 바깥쪽에는 약한 빛도 감지하는 간상 세포가 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이 세포들이 먼저 망가지기 때문에 대개 제일 처음 나타나는 알피 증상이 야맹증이다. 그래서 나의 어릴 적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밤은 전등이 없는 곳은 항상 어둠 뿐이고 가로등도 없는 시골에 살았기에 나는 어두워지면 집에만 있는 얌전한 아이였다. 딱 한 번 친구 따라 대보름 쥐불놀이에 나갔던 적이 있다. 그 때 친구가 만들어 건네 준 불놀이 깡통을 신나서 돌리자마자 나는 친구의 머리에 구멍을 내고 말았던 적은 잇었다. 야맹증으로 인해 친 사고는 이 뿐은 아니다. 한번은 한가한 야간 버스에 타기는 잘했는데 빈자리인 줄 알고 앉아 있던 생판 모르는 아가씨 무릎에 떳떳하게 앉아도 보았고 하수구 뚜껑이 딱 발 크기만큼 열려 있던 곳을 맞춤하게 걸을을 디뎌 허벅지까지 땅 속을 체험해 보기도 했고 약수터에 갔다가 평상시보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 있는 바람에 늦어져서 돌아오는 길에 밤이 찾아와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행히 나타난 불빛이 있어 빛을 따라 인가로 나온 적도 있다.
또 서서히 시야가 좁아지는 경향이 있어 밥상머리에서 밥통을 못보고 발로 차는 통에 방바닥 양념으로 간이라도 맞추려 밥덩이 한 바퀴 굴린 뒤 먹기도 했다. 그래서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제일 먼저 줍지 않아도 되는지 먼저 생각하고 꼭 있어야 된다면 떨어진 소리가 난 방향을 눈으로 먼저 찾고 손바닥으로 더듬어 자세히 찾아 보고 빗자루라도 있으면 쓸어 모아서 더 세밀히 조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한 명암대비가 분명하지 않은 부분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대학시절 공대 건물 현관 유리문이 항상 오른쪽은 열려 있고 왼쪽은 닫혀서 고정되어 있었는데 경비아저씨가 바뀌셨는지 두 문의 패턴을 바꿔 놓아서 나의 큰 바위 얼굴과 충돌한 불행한 현관문은 간신히 유리는 두꺼워 파손을 피했지만 고정시켜주는 걸쇠가 부러지는 불운을 맞았다. 조명에 따라 색약도 나타나 매장 형광등 조명 아래 진한 회색 바지를 골랐는데 밖으로 나와서 햇빛에 비추니 카키색이던 적도 있다.
이 외에도 겪는 증상들은 다양하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쉽게 빨주노초파남보로 구분짓는 이상의 다양한 색들처럼 존재한다.
그래도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판명을 받기 전까지는 그저 밤눈이 어둡고 덤벙대는 성격이라 물건을 잘 차고 다니는 친구였지만 명확하지도 않은 미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실명하게 된다는 준엄한 선고 뒤에는 소 코에 끼인 멍에처럼 있다가 한번씩 가슴을 에리게 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차라리 몰랐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가끔 하면서 견디다가도 시나브로 나빠진 눈이 갑자기 확연히 느껴지는 10년쯤을 주기로 끝없는 절망의 시간은 찾아 왔다.
처음으로 마음 고생이 심하게 온 것은 스물아홉 때에 일이다. 사무실 창가로 햇살이 들어와 눈부시게 어느 오후에 짬이 나서 업무에 필요한 책을 펼쳤을 때, 책 속에는 글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종이만 하얗게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작은 글자 뿐 아니라 큰 글자도 그림들도 사라졌다. 다른 것도 안보이나 해서 주변을 훑었다. 책상 위에 널려 있던 필기구들 파일들 계산기는 제멋대로 놓여 있었다. 좀더 멀리 보았다. 각자 책상에 앉아 열심인 실직원들, 시침을 굴리는 벽시계, 책장들은 그대로였다. 심지어 떨어진 휴지도 눈에 확 띄었다. 다시 책을 보았지만 아직 글자들은 전부 외출 중이다.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가야 할 곳이 생각나지 않아 휴게실로 갔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잠깐의 상황이야 하면서 격려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펼쳐진 책을 보았다. 여전히 난는 흰 종이에서 없는 존재들을 찾고 있다. 이젠 정말 실명인가 겁이 났다. 백내장이 온 것이다. 지금보다 불편해지면 수술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귀에 꼭 박고 잘 견디다가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그 기간은 그렇게 다정하지 않았다. IMF로 인해 줄어든 인원 수로 누구나 업무 부담이 가중되었고 각자의 일에 치여 감깐의 농담도 주고 받을 여유가 없는 시절이라 외로운 시간은 너무 많았다. 나는 바보같았다.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양, 왜 하필 나만 이래야 하는가에 화를 내다가도 지치면 슬펐다. 그래도 잘 살아 왔고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 다짐하며 다시 힘을 내기도 했고 할 수 없어져 버린 것들을 하나 둘 세면서 곱씹으면서 절망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아무것도 못하고 망설이는 사간은 2년이 넘었다.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 그 시간이 아까우 정도로 효과는 놀라웠다. 개명 수술이라고도 한다더니 정말 딱 그랬다.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잃었던 자심감도 따라 생겼고 정적인 사람에서 활동적인 인간으로 바뀔 수 있었다. 최근 7년간은 혼자 핸드폰 매장을 운영했다. 계약서 글씨들이 작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고객과 마주 보면서 서류를 보니까 글자들은 거꾸로 보인다. 그래서 돋보기로 일일이 들여다 보고 무슨 내용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까지 외우면 문제는 없었다. 마흔이 되면서 한번 더 심각하게 느낀 시력으로 남의 돈을 먹는 장사하기는 어눌해 보이게 됐다. 정안인과 동등하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직업이 아닐까 싶어 가능한 한 견뎌 보려 애도 썼지만 실수는 늘어 갔다. 하늘색을 구매하시길 원하는 손님에게 연분홍을 당연스럽게 내밀기도 하고 여러장의 계약서를 떨어뜨려 다 줍지 못해 고객이 지켜보다가 찾아 주시면서 눈이 많이 나쁘신가 본데 다른 종류의 장사를 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들었다. 외워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다. 속상함이 백태장이 왔을 때보다는 덜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실명인가 싶어 우울한 마음은 마찬가지여서 매장문을 열어야 할 아침이 오는 게 싫었다.
후발백내장 레이저 수술을 받았지만 수정체 부근의 치료이기에 망막변성으로 인해 발생한 색약과 시력저하는 크게 교정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구를 열심히 하시는 교수님들을 흉내 내어 스스로 안식년이라 칭하고 쉬었다. 더 이상 볼 수 없기 전에 보고 싶은 것 실컷 보고 혼자서 할 수 있을 때에 가고 싶은 곳들 많이 가 보거나 즐기고 싶던 일들 도전해 보고 싶었다. 생각한 대로 되지는 못했다. 현재 내 눈은 시야 5도 이하, 항상 하얀 안개가 짙은 세상에서 살고 있고 흰색, 분홍, 노란색, 하늘색 등등 연한 색들은 구별하기 힘들다. 벚꽃 흐드러진 곳도 갔지만 하늘과 벚꽃의 색이 구별이 안돼 얼룩덜룩한 무더기로만 보이고 빨갛고 노란 단풍들이 거무튀튀하게 보여 오자는 등산, 관광이 재미가 없었다. 사는 곳이 촌구석이라 버스가 흔치 않아 외출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한 1년은 참 길게도 너무 짧게도 지나갔다. 주변인으로 보기만 하던 1년은 고맙게도 세상이 궁금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의 두려움보다 용기가 더 커지기도 했다. 한 방에 부와 명예를 얻는 대박을 꿈꾸는 철부지의 나이는 아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작은 것들을 시작하려 한다. 아직은 밝히기는 부끄러운 너무 미미하다.
세상에는 저시력을 일으키는 다양한 병이 있고 그보다 다양한 증상을 겪고 있는 저시력자 또는 시각장애인이 있다. 가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몇 번은 보았을 것이고 더 가끔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만일 옷깃만 스친 전생의 인연이라고 우리가 있다면 자판기 앞에서 동전을 떨어뜨리고 남들처럼 찾아 줍지 않고 동전을 다시 꺼내 커피를 뽑지도 않고 가는 조금 이상한 저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지면 사과를 받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프게 발을 밟는 저 때문에 화가 나실 수도 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당신의 무릎에 무턱대고 앉아 버리는 변태스런 놈 때문에 황당하실 수도 있다. 이상하다 여겨 유심히 보시지 않는다면 남자끼리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모습을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실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저 때문에 당황스럽고 놀라시고 화나실까봐 여기서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 한번만 더 생각하시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저 특이한 경험을 했구나 하고 통 크게 받아 주시길 간청합니다. 저 닮은 저시력자들은 당신의 다양한 이웃 중에 있습니다. 실수를 잘 하는 이웃이라 생각해 주시고 가끔 지켜보시다가 작은 도움을 주신다면 당신의 이웃은 살만한 세상이라 느낄 것입니다.
창 밖의 날씨가 너무 좋아 자꾸 밖으로 밖으로만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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