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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안과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았습니다.
약 4~5년 전의 EOG, ERG 검사를 마지막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필히 상태를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검사는 심히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두 눈동자는 피곤함에 물들어 있는데...
안약을 넣고 동공마저 확대시키고 시선까지 이리저리
굴려야 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는 의사 소견을 들었습니다.
냉정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더군요.
'처음이 1.5 라고 보면 현재 1.3 정도로 진행이 된 상태.'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지만 아무래도 기분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진행이 된 것이니까요.
반짝거리는 밤하늘의 별빛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이고
불야성을 이루는 심야의 네온사인도 또렷하지 않은 채
아른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달빛으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상상은 더 이상 꿈조차 바랄 수 없고요.
뉴로테크의 치료제에 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니 하지요. 대부분 그렇듯이, 이런 류의 치료제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만이 그 효과가 입증되니까요.
한 인간으로서 정상인도 장애인도 아닌 상태로, 무엇인가를
숨기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기를 바란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숨길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공공연히 밝힐 필요도 없으니까요. 레티니티스 피그멘토사
라는 학술적 용어 대신에 간단한 야맹증이라는 표현으로
의문의 빈 자리를 채우곤 하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나 뭔지 알아. 중학교 가정 시간에 당근 많이 먹으라고
그랬잖아. 아니면 녹황색 채소나 토마토 같은 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무심결에 다음처럼 응수하죠.
'어 그래... 그렇지... 맞아.'
그리고 화제는 곧 다른 분야로 넘어가곤 합니다.
자조적인 독백은 비관적인 어조만 되뇌일 뿐이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은 생각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미래를 향한 장밋빛 환상은 어느덧 무채색의 흑백
영화로 내려앉아 버렸고,
사람을 향한 사랑은 벅차오르는 가슴 설레임보다는
걱정과 우려, 불신과 암담함으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과 따뜻한 미소로 누군가를 대하지만
내 안에 무섭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시무시한 뱀 한마리,
알피라는 미끌미끌한 불청객에서 비롯된 우울한 상념은
언제나 즐거워야 한다는 낙관적인 인생관을 부정하려고
애를 쓰죠. 음..
모르겠습니다. 사실 알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신이 있다면 이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고 그런 것이 없다면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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