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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
그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하늘로 떠났습니다.
충무공의 얘기가 아닙니다.
1995년 3월 7일 아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 최초의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의 유언이었습니다.
그는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것이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하되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에 넣어 최소면적의 땅에 묻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런 유언 때문에 공 박사가 별세했다는 소식은 이틀이 지나서야 동아일보 특종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공 박사는 콘택트렌즈와 쌍꺼풀수술을 국내에 도입한 유능한 안과 의사였지만 한글사랑, 맹인사랑으로 더 유명합니다.
그는 1938년 공안과에 눈병 치료를 받으러 온 한글학자 이극로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감화를 받은 뒤 한글의 과학화에 앞장섭니다.
고성능 한글타자기를 발명했고 한글 텔레타이프, 한영 겸용 타자기, 세벌식 타자기 등을 발명해 보급했습니다.
한글시력표를 만들었고 한글문화원을 세워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자판문제 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공 박사는 특히 세벌식 타자기에 애착이 컸는데, 세벌식 키보드를 써 본 사람은 2벌식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고 오자가 적은데다 편리하다고 한목소리를 내더군요.
정부가 성급히 2벌식을 표준으로 정하는 바람에 시장에 보급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공 박사는 당시 PC통신에서 세벌식 타자의 우수성에 대해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당시 ‘초딩’, ‘중딩’들의 '무지한 욕'에 개의치않고
계속 글을 썼습니다.
그는 또 자신은 옷과 신발을 해어질때까지 입고 신으며! ! 검소하게 살았지만,
맹인부흥원을 설립하고 장님을 위한 타자기, 지팡이를 개발하는 등 평생 장님을 위한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국일보에 의해 ‘한국의 고집쟁이’ 6위로 선정된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공병우 사망’을 선언했고 서슬퍼른 5공화국 때 대놓고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형식보다는 본질에 충실해 집안의 문지방을 모두 없애버렸고
‘못사는 나라에서 옷치장에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며
한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며느리에게 폐백 절하는 것보다 악수나 한번 하자고 청했습니다.
시간을 금쪽같이 여겨 5분 이상 머리를 깎는 이발소, 낮에 열리는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평생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고
미리 예약하지 않고 온 손님은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도 돌려보냈습니다.
공 박사는 미국에서 한 60대 언론인을 만나 얘기하던 중 길거리에서 “젊은 사람이 컴퓨터도 안 배우냐”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는 젊음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공부를 하며 사회에 열심히 공헌하느냐가 잣대라고 말해왔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젊게 살다가 가셨습니다.
늘 공부하며 사는 것,
남의 눈치보다는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
소아(小我)보다는 큰 뜻에 따라 사는 것,
사랑을 품고 사는 것,
이러한 삶이야말로 젊은 삶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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