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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엔 1차합격 '5전6기'
"시각장애인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 찾겠다"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갑자기 찾아온 시련에 꿈을 접을 뻔 했어요. 시력을 잃은 뒤 시험 공부하느라 재활교육도 제대로 못했는데 세상 밖으로 나갈 걸음마 연습부터 해야겠어요."
21일 20대 시각장애인 청년이 여섯 번의 도전 끝에 처음으로 사법시험 2차 시험에 합격해 화제가 되고 있다.
마지막 관문인 3차 면접시험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역경을 딛고 법조계 등용문의 `9부 능선'을 당당히 넘어선 주인공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최영(27) 씨.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시력이 나쁘다고만 여겼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병원을 찾았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날이 갈수록 시야가 점점 좁아졌고 밤에는 사물을 식별하기 어려운 야맹 증세도 나타났다.
지난 2000년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남들과 같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2005년부터 급격히 시력이 나빠지며 꿈을 접어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2005년 1차 사법시험을 치고 시험을 그만둘까 생각했습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었는데 점자조차 읽을 줄 몰랐으니까요."
그는 현재 시각장애 3급으로 집중해서 책을 들여다보려 해도 겨우 한 글자가 눈에 들어올까 말까 한 상태다.
하지만 최 씨는 자신을 덮친 불운에 굴복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사법시험에 계속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시험을 치기 위해 자신만의 음성 교재를 만드는 것.
다행히도 그를 돕겠다는 재단이 있었지만 도우미들을 통해 자신이 학습해야 하는 법학 교재 한 권을 음성 낭독 기능이 있는 컴퓨터에 일일이 쳐 넣는 데에만 길게는 서너 달씩 걸렸다.
원하는 책을 그때그때 볼 수 없는 것도 답답했지만 음성 교재를 듣는 식으로는 남들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서너 배 이상 더 걸리기 일쑤였다.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된 건 학교 친구들이었다.
최 씨는 "앞이 보이지 않아 밥 먹으러 식당에 갈 때도 누군가를 붙잡고 가야 하는데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늘 챙겨줬다"며 고마워했다.
그는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다섯 번의 낙방 끝에 2007년 처음으로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올해 치른 2차 시험을 제외하더라도 `5전6기'인 셈이다.
법무부는 2006년부터 최 씨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의 경우 음성 지원 프로그램이 장착된 컴퓨터를 통해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는 이 제도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그는 장래 포부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시각장애인 변호사로서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시각장애인 법조인이 나온 적이 없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250여명, 일본에서는 3명이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 씨는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 바라는 게 있다면 장애인들에게도 읽을 권리가 보장됐으면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나처럼 사법시험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이 볼 수 있는 책이 너무 없다. 출판사들이 저작권에 대한 우려로 시각장애인들에게 텍스트 파일을 제공하는 것을 꺼리는 데도 이유가 있다는데, 뜻만 있다면 부작용을 막을 방법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시험 준비하느라 시력을 잃고도 재활교육을 받지 못해 보행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이제는 걸음마부터 세상 밖으로 나갈 연습을 하겠다"며 한껏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