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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읽기의 즐거움
    홍해 2007/07/10 729
      제가 시각장애인 잡지인 '손끝으로 읽는 국정'이라는 격월간지에 연재를 하고 있는데요. 이번 7,8월호에 연재하려고 하는데 한번 읽고 좋은 의견 있으면 주세요. 근래에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머릿속에서 자주 아른거린다. 진화론에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고 말한다. 적자생존 같은 무거운 개념 정리는 차지하더라도 진화론적 매커니즘이 꼭 갈라파고스 군도의 파충류 처럼 생명체의 물리적인 변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해 보인다. 진행성 망막질환으로 인해 서서히 시력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 내 시력이 정말 나빠지고 있구나!’ 라고 느낄 때가 책 읽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데 있다. 사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지나가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잘 못 알아보는 정도였지 책글씨가 읽기 거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활자크기의 짧은 글을 읽으려 해도 꽤 긴 시간이 소요된다. 덧붙여, 약간의 독서라도 하게 되면 온갖 신경이 집중되어야 하고, 이로 인해 쉽게 피로감을 느껴 책을 덮어버리는 일이 일상으로 되어 버렸다. 근 2년여 동안 책과는 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높고도 기나긴 벽을 쌓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게으른 천성이나 일상의 분주함을 넘어선 보다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소인에 기인했다고 변명하고 싶다. 하지만 최근에 시각장애인용 전자도서를 음성으로 듣게 되면서 새로운 방식의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근 30 년간의 묵자문화를 뒤안길로 보내고 점자 또는 음성문화로 대표되는 시각장애인 문화로의 전환기, 그 과도기적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처지가 개탄스럽거나 우울모드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조금은 어색한 기계음이기는 해도 한나절에 가벼운 무협소설 정도는 2권 이상 거뜬히 소화해 내는 속도적 효율성에 만족을 넘어 경외감마저 느낄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생명체가 또 하나의 진화론적 적응과정에 접어든 셈이다. 묵자를 보기 힘든 시각장애인들은 점자도서나 음성녹음도서 그리고 전자도서를 이용하여 독서 및 문자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점자도서는 시각장애인의 대표 문자로서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용이하나, 도서 분량이 방대하고 읽기속도 또한 느린 편이다. 음성녹음도서의 경우는 읽기봉사자들이 도서를 읽어 녹음하는 형식인데, 고가의 녹음장비는 물론이고, 소양을 갖춘 능숙한 봉사자가 요구되는 등 점자도서와 함께 상당한 제작비용이 소요된다. 하지만 실제 사람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좋은 점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전자도서는 주로 봉사자 등을 이용해 주로 TXT형식으로 제작하여 음성출력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음성화한다. 아직까지는 조금 어색한 기계음이라는 단점은 있으나, 점점 사람의 실제 음성과 유사하게 발전하고 있고, 읽기속도나 음질 등을 자유로이 조정할 수 있어 시각장애인들의 문자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묵자를 대신하는 여러 가지 대체 문자들이 이용되고 있지만 아직 여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즉, 도구는 있으나 담을 컨텐츠가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용 도서들은 묵자도서를 다시 디지털 파일화 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저작권보호로 인해 출판사들이 디지털화된 파일을 제공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도서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제한적일 수 밖 에 없다. 개인적 요구에 의해 제작된 일부 베스트셀러,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참고서, 특수교육․사회복지 분야의 전문서적, 그리고 이료도서 들이 그 주요 목록들이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방면의 많은 도서들이 제작되어 있고, 관련 종사자들에 대한 노고는 그 어떤 말로도 충분히 치하하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태생적 한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가 어떤 곳인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 는 순간에도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사회이다. 종교, 철학, 사회과학, 순수과학, 기술과학, 예술, 어학, 문학, 여가, 생활 등 수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도서들이 만들어 진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논문, 각종 고지서, 제품 및 의약품 등의 포장지나 첨부문서, 사용설명서 등은 어떠한가. 우리들이 가늠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인쇄물들의 홍수이다. 하지만 이런 방대함은 시각장애인에게는 여러 사치중의 하나이다. 사후 타인의 결정에 의한 일부 취사선택 된 정보에만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이번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의 정보접근권과 관련된 조항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제5절 정보접근권,의사소통,정보보호. 제15조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 2항. 출판물을 인쇄 또는 전자적 형태로 지속적으로 간행하는 사업자와 이를 보관,대출하는 기관, 영화,비디오물 등 영상물을 제작,배급하는 사업자, 「방송법」에 따라 방송물을 송출하는 방송사업자 등은 장애인이 장애인 아닌 사람과 동등하게 제작물 또는 서비스를 접근, 이용할 수 있도록 자막, 수화, 점자 및 점자 변환, 보청기기, 큰 문자, 화면읽기, 해설, 확대프로그램, 인쇄물음성변환출력기, 음 성서비스, 전화 등 통신 중계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이렇듯 법률에도 명시하고 있는 정보접근권 문제를 이제는 진지하게 논의하고 그 해결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에 나설 때 이다. 모든 인쇄물에 대해 디지털 파일 제공을 의무화 한다면 문제 해결은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쉽게 결론내리기는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깊이 있게 고민하고 그 방법을 찾는 노력만이라도 기울인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만도 아니다. 최신의 디지털 기술들은 우리들 상상의 바운더리를 계속 확장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 한 예로 국내 모기업이 개발한 2차원 바코드를 활용한 인쇄물 음성변환 출력기가 있다. 이 장비는 인쇄물의 내용을 담고 있는 2차원 바코드를 인식하여 내용을 음성으로 출력해 주는 장비로서, 이미 일부 도서는 물론이고 법원의 판결문에도 도입되어 있다. 학창시절 책 읽기에 그리 열성적이지는 못했다. 항상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듯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묵자로 된 인쇄물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이고 책 읽기가 얼마나 재밌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된 것이다. 묵자 인쇄물이 아니어도 좋다. 시각도구가 아닌 그 어떤 매체를 통한 책 읽기라도 좋다. 책 읽기의 즐거움은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