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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상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터미네이터 2006/01/06 885
      희귀 난치성‘척수성근위축증(SMA)’을 앓고 있는 남윤광(좌)군과 아버지 남우현(우)씨. “황우석 교수님은 제게는 어둠 속에 한줄기 등불 같은 분이었는데…, 하지만 정확한 건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요. 또 지금 여러 곳에서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니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잖아요.” 생후 18개월부터 난치성 ‘척수성근위축증(SMA)’을 앓고 있는 남윤광(22ㆍ서울대 3년) 씨는 병실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밝은 얼굴로 희망을 얘기 했다.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1급 신체장애인. 연필 잡는 것부터 책장 넘기기까지 그에게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이런 그가 지난 2003년 장애인 특별전형이 아닌 일반 지원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당당히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어느덧 3년 전의 일이다. 지금의 윤광 씨는 어머니 최재례(49) 씨의 눈물이 없이는 만들어질수 없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을 업고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쉬는 시간마다 수업준비를 해주고 양호실에서 다음 시간을 기다렸다. 이런 억척스런 모습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머니는 애써 모른척했지만 당시 남 몰래 흘린 눈말이 서너 말은 된다고 한다. 학교에서 윤광 씨는 겉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기 일수였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화를 참지 못하고 교실 바닥에 도시락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한다. “친구들의 놀림도 참기 힘들었지만 야외견학 수학여행 수련회 등에서 소외되고 혼자 남겨질 때는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일주일에 한 두 시간이었지만 체육시간에 텅 빈 교실을 혼자 지키고 있으면 왜 그리 시간이 길고 외롭던지…” 윤광 씨가 책상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세상과의 소통 때문이었다. 다 포기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혼자 갇혀 지내는 것이 더욱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것. “세상에 공부가 재미있는 사람도 있나요? 저도 재미없어요.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니 공부하기는 더욱 힘들죠. 그래도 학교 가는 게 좋아요.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함께 어울리는 게 좋아서 공부했어요.” 아버지 남우현(51) 씨는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요리사인 남 씨는 억척스럽게 일했지만 수입은 뻔했다. 윤광 씨의 약값이 부족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윤광 씨는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대학에 진학했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결국 지난달에는 척추가 앞으로 165도까지 휘어지면서 호흡도 곤란해졌다. 당장 수술이 필요했지만 돈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년간 곁에서 윤광 씨를 간호하던 어머니의 류머티즘이 심해지며 아들을 돌보기가 힘들어졌다. 어쩔 수없이 지난해 5월부터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윤광 씨의 간병에 나섰지만 가정형편은 점점 어려워졌다. 다행히 윤광 씨를 알고 지내던 몇몇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입원해 지난달 16일 서울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아버지 남 씨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윤광이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며 “완전히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술이 잘됐다고 무턱대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2000만원이 넘는 수술비가 윤광 씨 가족에게 무거운 짐으로 남은 것. 또 퇴원 후 윤광 씨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각종 보조의료기구들을 구입해야 하고 아내 최 씨의 치료비도 마련해야 하는 남 씨의 가슴은 답답하다. ▽“포기할 수 없는 가족, 다시 떠오르는 희망”▽ 윤광 씨가 태어나던 1984년 남 씨의 가족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윤광 씨는 첫돌이 지나도 일어서지 못했다. 남 씨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가 생전 듣지도 알지도 못하던 SMA라는 병명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그는 “당시에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마음의 평정을 잃고 갈등에 휩싸여 직장생활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잠시 방황했지만 남 씨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병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명하다는 병원과 침술원 등을 찾아다녔다. 남 씨는 “한 번은 침이 유명하다는 말만 듣고 밤 12시에 윤광이를 업고 집을 나선적도 있었다”며 “병을 고치지는 못했지만 당시 등에 업혀 다니던 윤광이가 거리 간판을 보고 한글을 깨우쳤다”고 회상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언제나 사람이 희망이었다.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윤광 씨를 일반학교에서 교육받게 했고, 윤광 씨 역시 그것이 좋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초등학교는 집과 멀지 않았지만 윤광 씨를 받아 주는 일반 중고등학교 찾기가 쉽지 않았다.어머니가 여기저기 눈물로 호소하고 매달려야 했고 그래도 거절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윤광 씨는 “부모님과 학교를 찾아다니며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면서 “장애가 이럴 때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년이 올라가도 교실은 꼭 1층만 배정을 받아야 했고, 화장실 등 여러 가지가 불편했다. 가족들은 “차라리 장애인학교에 보내자”고까지 했다. 윤광 씨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짝이 되어 함께 해준 두 친구가 있어 너무 고마웠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들의 차가운 시선이 따뜻한 손길로 변했고,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거의 모든 MT에 빠지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학교 이야기를 하는 윤광 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서 학교에 복학하는 게 요즘 그의 소원이다. 새해 소망을 묻자 그는 “아버지께서 저를 돌보시느라고 일도 못하시고 경제적으로 힘들다”며 “현재로서는 가족들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제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전동휠체어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랑은 제 가슴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습니다”▽ 남 씨는 윤광 씨 생각에도 가슴이 아프지만, 반평생을 아들 간병에만 매달려 산 부인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고 한다. “윤광이도 대단하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은 아내예요. 남편으로서 잘 해준 것이 없어서 항상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아내를 존경해요. 아내를 향한 사랑은 항상 제 가슴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습니다.” 아내 얘기를 꺼내는 남 씨의 눈가엔 금방 눈물이 고인다.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윤광 씨는 옆에서 “어머니가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고 병까지 얻으셔서 너무 미안해요. 새해에는 더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도 힘내세요. 새해에는 제가 더 건강해 질 것입니다”라며 애써 밝게 웃었다. “지금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사회복지학에도 관심이 많아요. 저 같이 난치병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는 손을 내밀면 따뜻하게 잡아 주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척수성 근위축증(Spinal Muscular Atrophy, SMA)이란 유전적 신경근육질환으로 특정부분의 근육에 손상이 발생해 몸이 마비되며 차츰 전신으로 번진다. 팔 다리 목 허벅지 등의 근육이 주로 손상되며 다리근육 약화가 특히 빨리 진행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쪽 부모로부터 SMA의 불량성 유전인자를 하나씩 받아 발병하며 1891년 오스트리아에서 처음으로 보고 됐다. 1990년 SMA 유전자 위치가 밝혀졌으며 전체 인구 중 40명당 1명이 SMA 보인자이며 약 6000명중 1명꼴로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민회 동아닷컴 기자 danny@donga.com ▲도움문의=(사)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www.kord.or.kr) 02-714-5522/8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