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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가 이글을 시작하려던 때만 하여도, 협회의 자료실
이나 정리하고 그내용을 일관성있게 엮어서 다듬어 보면 좋을 것 같은 생각 이었읍니다. 그래서 흩어져 있는 연구 결과를 끌어 모아서 독자적인 스토리를 구성하고 간간히 최신의학 소식을 덧붙여 치료 희망을 나눌 수 있으리라 의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의학분야에는 무지하기 짝이없는 저로서는 정말이지 헛된 희망과 무책임한 예측도 내놓을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제가 용기를 내어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희망을 찾는 답시고 길을 나선 이유는 " 우리의 질병에 대하여, 우리들 만큼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리고 질환의 특성상, 전문가들 조차 잘 알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는 답답함도 있었읍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의학이 시장성을 중시하는 경제학의 수단으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서울 한복판의 개인 안과병원들은 성형외과 처럼 라식수술 환자만을 상대로 하여, 이미 백내장 환자들을 거절한 지가 꽤 오래 되었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시간대에 10배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라식시술이 환영 받는 것도 당연합지요. 비싼 임대료에 화려한 인테리어 고급 명품 손님이 와야되는데 값싸고 거추장스런 백내장등의 환자들 내왕을 반길리가 없읍니다. 더구나 알피에 대한 안과 지식은 대학교와 전문의 시험을 위한 노트내용 정도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최근에 우연히 야후의 지식 검색에 <야맹증과 유전>이란 내용을 살펴 본 적이 있읍니다. 여러명의 내노라하는 안과전문의가 등장하여 질문에 답하였지만, 알피질환은 천편일률적으로 " 우리의 망막엔 광수용체가 있는데 처음엔 막대세포가 죽어가면서 야맹증이 발현되고......어쩌고 저쩌고" 로 시작하면서, 장작 후반부는 의견이 매우 다양해집니다. 심지어는 " 곧 실명되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 " 유전이 될 것이니 남자 친구와 상의하여야 할 것이다." 등을 비롯하여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되어버리는 인생 상담으로 끝맺게 되는 것이 알피질환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우주 비행사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미시세계의 탐험에 나선 저로서는 차츰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지요. " 목마른 놈이 샘을 판다." 식으로 파들어 갔지만 그럴수록 나의 호기심과 의구심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으로 변화되어 갔읍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주만큼이나 넓고 광대한 세포의 세계를 탐험하고 여행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읍니다. 더구나 세포의 죽음을 알아가면서는 , 더욱 크고 복잡한 또다른 장벽에 부닥칩니다.
어느덧 우주탐험가가 아니라, 형사 사건의 배후를 캐듯이 알피라는 죽음의 사건을 파고드는 담당 수사관이 되어 갑니다. 사건의 발생, 시각, 장소, 용의자 (또는 관련자)의 인상 착의, 범인의 배후, 국과수(?)의 검증 자료와 주변 인물의 탐문수사등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여 우리 망막세포의 죽음을 밝히는 <범죄의 재구성>이 시작 된 것입니다.
설령 초보 수사관으로서 불충분한 증거와 어설픈 심증 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는 무모함이 따를 수도 있읍니다. 또한 제반 정황을 건너 짚어서 어설픈 희망을 유추해내는 미숙함도 발견될 것입니다. 그런데 때를 거듭할수록, 처음 의도 했던 희망 보다는 앞서말한 나의 호기심과 의혹의 부피만이 더욱 커져감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버티는 힘은, 우리 배심원 환우 여러분이 갖고 계시는 판단력으로 나의 과오를 걸러내고, 내 의혹을 다독거려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도 갈길이 먼데 서론이 길어져 버렸읍니다. 이제 사건의 출발은 희망찾기 -C 편에서 언급된 광수용체 막대세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2004년도 협회 자료실에 나와있는 막대세포의 죽음을 들여다 봅시다.
<대부분의 유전자 돌연변이에서 막대세포만 선택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경로를 통해 막대세포가 프로그램된 세포의 죽음, 즉 아포프토시스에 의해 죽어가도록 유도했다. [역자주: “apoptosis”는 유전자에 의해 제어되는 세포의 자발적인 죽음을 말하는데, 아직까지 적절한 번역어가 없기 때문에 “아포프토시스”라고 음역했습니다.] 이러한 막대세포의 죽음은 성장인자의 박탈, 그리고/혹은 세포주기의 변형에 기인한다.임상적으로, 막대세포는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해서 직접 영향을 받지만, 원뿔세포의 경우는 막대세포의 손상 결과 이차적으로 퇴화가 진행된다.>
이 자료 내용에서 부터 나는 의혹에 봉착합니다. 우리 망막속에 막대세포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하는 점이지요. 물론 이러한 호기심이 짐짓 쓸데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읍니다만, 죽음에 대한 정확한 사인의 재조사는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의 첫번째 엑션입니다.
질문을 더 확장하여 볼까요? 막대세포의 죽음은 필연적인가요? 우연적 사건인가요? 계획된 죽음인가요? 우발적인 살상인가요? 여러분이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전자의 질문은 후대에 유전이 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또한 후자의 질문은 유전을 포함하여 아직도 논란중에 있는 신진대사형 발병이나 자외선 같은 환경적 요인으로 귀착될 수 있는 질문이 됩니다.
위 자료의 문맥상으로는 <프로그램화 된 세포의 죽음 -아포프토시스>로 규정하고 세포의 자발적인 죽음으로 묘사함으로서, 우리에게 망막세포의 죽음은 타살보다는 자살의 심증을 굳히게 합니다.
그렇지만 자살로 단정하기에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전편에서 말한 Apoptosis의 죽음은 발생 단계에서 올챙이의 꼬리가 사라지는 것이나 사람의 손의 물갈퀴가 없어지는 <죽어 사라져 주는 것> 과 성장 단계에서는 세포의 잉여 증식으로 싱싱한 세포를 선택하고 노화된 세포를 걸러내는 유전자 DNA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러한 죽음은 한마디로 의롭고 선한 그래서 장렬한 죽음이 됩니다.
그런데 망막세포를 죽여서, 객체의 시력을 상실시키고 외부세계로부터 시야의 창을 닫게 함으로써 예상되는 이득은 전혀 없읍니다. 그럼에도 세포가 알아서 <자발적인 죽음>을 택한다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지 않읍니까?
물론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일어나는 손상된 DNA가 범인으로 지목됩니다. 이 불량한 유전자 조각이 세대를 이어 복제되어 내려오면, 그때는 우리 망막세포에 계획된 죽음이 찾아오고 만일 당대에 돌연스럽게 변이되면 그 결과로 우발적 죽임을 당하게 되는 두 부류의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그렇다면 세포의 자살이든 타살이든 범인은 DNA 일까요?
물론 세포의 핵속에 숨어서 옛날 모스크바의 KGB처럼 사살 지령을 내릴 수 있읍니다. 그러나 DNA는 스스로 그 돌연변이된 불량 지점을 수정하는 천재적 시스템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억개의 염기쌍을 복제시에 약 100만분의 1이라는 실수가 나옵니다.
그러한 실수로 인한 잘못된 명령이 RNA의 전령에 의해, 세포 핵 밖으로 전달되고 그 지시에 따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그렇다면 이 DNA의 충실한 전령자 RNA 가 우리 막대세포내에서 무슨 짓을 저질러 놓기에 타살과 자살의 의혹을 불러오게 하는 걸까요? 물론 추정되는 죽음의 용의선 상에는 이 RNA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후편으로 넘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