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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국은 현충일의 행사가 다 끝난 밤이겠지만 제게는 지금이 6월 6일 아침 현충일입니다.
아무도 태극기를 달지 않는 동네를 내다보며 역시 제가 넘의 나라에 와서 살고 있구나를 느껴 봅니다.
제가 과천 살때에는 한 2년 반장, 5년 통장을 했었는데 국경일날이면 이웃분들에게 태극기를 달아 달라고 홍보하러 다니던 생각이 문득 나네요.
미국에 와서 2년만 살다갈 계획으로 왔다가 미국 학교를 2년(3,4학년)을 다녀본 아들 녀석이 계속 미국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말에 우리 부부는 그저 아들하나 위해 이곳에 주저 앉아 살고 있지요.
종종 아들에게 " 네가 이곳에서 학교다니고 싶어해서 다니는것이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꼭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휘날리는 세계적인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외삼촌의 병이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니까 꼭 네가 삼촌의 눈을 치료 하는방법을 개발해내고...."
그러나 요즘 황박사님이나, 최교수님 등이 알피인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치료 방법에 열심히 노력하고 계셔주어 감사함을 느끼고 살고 있지요.
제가 하도 태극기를 휘날리라고 5년간 떠들어 왔더니 아들이 조금 지겨워 하는것 같아 요즘은 입다물고 있었는데 비디오 가게에 갔더니 한국영화인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있더군요.
사실 저는 전쟁을 무척 싫어 하는사람으로서 6.25전쟁이 배경인 그런 영화가 미국시장에 진출된것이 그리 자랑 스럽지만은 않았구요.
늘 저는 이북에서온분들의 자제들이나 이곳에 배가 고파 왔다는 분들의 과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가슴아픈 슬픈 이야기를 다 듣고 난후에 제가 할수 있는말은 "우리는 모두 6.25전쟁의 희생양들이야." 라고 했었지요.
실제로 저의 친정 아버지께서 6.25전쟁때에 부상당하신것때문에 백혈병으로 돌아 가셨던날이 6월7일인 내일 이기에
늘 현충일때면 남보다도 나라를 위해 희생되신선열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묵념을 드리고는 했었는데.....
미국에 와서는 현충일 조차도 잊고 살게 되었네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던날에 그 아들인 동생은 장애인 노래자랑에 나간다니.....
아버지가 살아 계실때에 동생에게 열심히 간고기와 간유구라는 약과 원기소등을 사다 먹이시던 생각이 나네요.
야맹증을 고쳐주시려고 많이 노력 하셨었는데....
장애인 체육대회, 장애인의날, 그러한것들이 내게는 관계없는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던것에 부끄러움을 느껴 보면서.....
저에게 동생이 했던말이 생각나네요.
"누나는 몸과 정신이 다 병들었구만. 나는 몸(눈)만 병들었는데."
1급 장애인 판명을 받고 흰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면서도 무언가에 열심히 도전해 보려고 하며 밝게 힘차게 살아가려는 동생이
내일 장애인 노래 자랑에서 좋은 성과 있으면 좋겠다고 먼곳에서 응원을 해 보면서.....
오히려 누나가 동생에게 한수 배우면서 삽니다....
워낙 낙천적인 동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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