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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사건>
회원들간의 이런저런 사모임들이 더욱 활성화되면서 사랑방은 각종 모임에 대한 글들도 자주 올라오기 시작했고 회원들 간에는 친 형제이상의 가족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던 것이 이 동병상련의 심정이 얼만큼의 결속력을 가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주로 취미가 같거나 공통된 관심분야를 가졌거나 직업이 비슷하거나 처지나 상황 등이 비슷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내면과 진심을 느낄 때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법입니다. 공감대가 있어야 하는데....
RP를 빼고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기에...
시간이 많이 흐르면 RP 라는 것을 빼고도 결속할 수 있는 공동의 그 무언가가 없으면 추구하고자 하는 공통된 무엇인가가 없으면 자칫 서로간의 실망감만 가득하게 되면 어쩌나....
그런 우려는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열림원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결집력이었습니다.
2003년 1월 5일
재선으로부터 메일이 한통 왔습니다. 얼마 전 나온 신간서적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파아란’ 이라는 가족회원에게서 온 것을 전달한 것이었죠. <달항아리 속 금동 물고기> 라는 책에 언급된 RP관련내용 때문이었는데 내용을 보니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단 재선에게 홈피에 아직 공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고 내가 책을 읽어보고 나서 판단하겠다고 했습니다.
난 즉시 서점에 가서 문제의 책을 사서 읽고 문제의 페이지를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재선은 몇몇 사람에게 사실을 알리면서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는 듯 했지만 거의 대부분 시큰둥한 대답들이라고 했습니다. 게중에는 소설인데 뭘 그러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전화를 끊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하면서 귀찮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책을 정리 분석한 후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으며 각 페이지에서 문제되는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 나갔고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우리의 대처는 매우 긴박하였고 바로 긴급 대책회의를 하고 출판사 열림원에 알피협회 이름으로 공문을 보내고 작가에게도 공문을 보냈습니다.
다음날은 회원 10여명과 함께 열림원으로 가서 항의를 하였고 저녁이 되자 한 두사람씩 더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지방에서 온 회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만약의 일에 대비하여 방송국에 보낼 보도자료까지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 일이 언론까지 갈 경우 얼마나 승산이 있는가도 여러 전문가들을 통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명백한 인권유린이나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소설 속의 이야기 이고 실제 특정한 누군가를 지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또한 하나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 후에 환우들이 받을 실망감등도 함께 생각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우리의 항의와 투쟁은 계속되었고 참석하는 회원수도 조금 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집도 찾아가고 그 책을 심사한 심사위원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고 전화도 하면서 호소도 하였습니다. 매일 인천에서 서울까지 왔다갔다 하다보니 집안 꼴과 아이들 꼴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홈페이지에는 늘 글을 올리는 회원만 올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지켜만 보는 방관자가 더 많았습니다.
왜 이럴 때 침묵할까... 그 사건에서 가장 든든한 백그라운드는 용감한 아줌마 부대였습니다. 겨울의 힘겨운 투쟁이 끝나고 나서 열림원에서는 책을 모두 수거조치 하기로 약속했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책의 서평을 발견즉시 삭제하고 우리에게 사죄의 뜻으로 협회에 기금을 기탁했고 책자도 2종 발간해 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합의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이 일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역시 이 일에도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공개적 의견을 내는 일은 없었고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협상 단계에서도 회원들의 의견을 구했으나 홈페이지는 조용해졌습니다.
더 끝까지 가보자는 회원도 있었으나 그러면 끝까지 밖에서 함께 다니며 단체행동을 해줄 용의가 있거나 방송출연이라도 감행할 사람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협상의 수위는 이사회에서 결정이 되었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야 했습니다.
열림원에서 받은 기금은 반드시 협회회원들이나 환우들을 위한 공익적인 일에만 쓰기로 내부적으로 약속을 하였고 반드시 이 돈에 대한 쓰임은 특별히 관리하여 그 용도를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직 이 돈은 운영비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책의 수거 및 약속이행을 위한 일의 수습과 뒤처리를 해준 것이 김만성씨와 이정복씨였습니다. 회원들이 생각하기에 모든 일이 일단락 되면 거기서 끝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모든 일은 진행과정만큼 힘든 뒤처리가 남아있고 이러한 뒤처리는 티도 나지 않으면서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정복씨가 이 일의 마무리에 참여했다가 관리팀장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 역시 극구 사양하다가 끈질긴 설득에 그 직책을 맡게 되고 그 후 1년간 많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한찬수 사무국장은 당시 회사업무로 매우 힘든 상황이 되었고 늘 크고 작은 업무를 해야 하는 사무국장 자리를 내놓게 됩니다.
집요한 설득으로 김만성씨는 결국 사무국장자리를 수락하게 되고 한찬수씨는 부회장으로 선임이 되고 저 역시 당시 상담실장 겸 이사를 맡고 있다가 부회장으로 선임이 됩니다. 주로 재정 및 관리 쪽은 한찬수 부회장님이 맡게 되고 제가 그 외 상담과 학술, 교육 쪽의 일을 맡게 됩니다.
오준석씨 역시 열림원 사태에 참석했다가 영광스럽게? 스카웃되어 1년간 홍보팀장을 맡아 고생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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