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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화합>
한찬수 사무국장 체계가 되면서 협회는 더욱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고 집행부들을 잘 포용하고 컨트롤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분이어서 그런지 적어도 일하는 사람들 간의 작은 마찰이나 갈등은 줄어드는 듯 했고 몇 안되는 인원이었으나 집행부간의 내부결속력은 점차 강해져 갔습니다.
협회가 변화를 겪는 동안 홍보팀에서는 새로운 홈페이지 이전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고 소식지도 더욱 내용면이나 외관상으로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갔습니다.
당시 홍보팀은 김만성씨를 주축으로 하여 홈페이지 관리와 소식지 업무를 맡았는데 소식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취재가 있어야 하고 여러 번 모여서 작업을 해야 하는 관계로 알게 모르게 돈이 들어갔고 당시 직장을 그만 둔 김만성씨에게는 큰 부담이 된 듯 했습니다.
그러나 교통비정도의 최소한의 활동비를 받으며 의욕적으로 자기 주관을 갖고 일을 했습니다. 특히 소식지 팀은 눈이 좋은 사람들이 필요했으므로 조윤주씨(해피)를 비롯한 정안인과 활동이 가능한 회원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드디어 3월에 조재선씨의 개인홈페이지에서 협회홈페이지로 이전을 하게 됩니다.
홈페이지에 대한 지원은 남혜운회장의 대학동기동창인 아리수미디어의 이건범사장님이 해주셨고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셨고 현재의 홈페이지의 서버역시 아리수의 서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경기로 회사가 침체기에 들어서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원들의 불만도 있었으나 지금까지도 도와주고 계십니다.
4월 어느날 저에게 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방송국 PD였는데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이하여 사랑의 릴레이 방송을 하는데 희귀질환 연맹의 김현주 교수님께서 RP협회를 지원해 주고 싶다고 섭외를 요청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작년 12월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필름을 사용하고 싶은데 허락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음성변조는 이런 류의 방송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므로 모자이크처리는 그대로 두되 음성은 그대로 방영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계기로 협회에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재선씨의 필름 일부가 방영이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방송의 게스트로 나왔던 서울대병원 안과 유영석 교수님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직접 참석했던 사무국장과 이영호님을 비롯한 몇 분이 유교수님께 협회의 자문의사가 되어 주실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혼쾌히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900 여 만원이라는 우리 협회로서는 큰 돈을 후에 기금으로 전달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방송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어떤 일이든 때가 되어야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장은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는 이익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미래의 밑거름이라면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때론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과히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고 저는 지금도 반대가 훨씬 많았던 상황에 욕을 먹어가며 방송에 출연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고 함께 출연했던 재선과 수민에게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릴레이를 계기로 한국RP협회와 홈페이지는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역시 접속수와 회원 수도 늘어갔습니다.
6월에는 한찬수사무국장이 사무국장 취임 후 처음으로 큰 행사를 열게 되는데 ‘RP한마음 축제’를 연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영석 교수님과 김현주 교수님도 참여하여 땡볕에서 조촐한 세미나도 했고 RP선배들의 인생의 교훈도 듣고 체육대회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규모로 이런 행사를 개최하기는 좀 무리한 감이 있었으나 이를 통해 회원들의 결속력이 강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행사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저와는 의견이 대립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한찬수 사무국장과 내가 지닌 장점 중에 하나는 입장이 달라도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이었고 적어도 의견이 다를 경우 서로 절충하려는 기본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으며 자기의 분야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결정된 후에는 말없이 협조하고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열띤 토론과 논쟁은 하되 그 과정을 거쳐 결정된 사항에는 절대 승복하고 돕는다는 원칙은 저뿐만 아니라 차기 사무국장인 김만성씨 역시 확고하여 설사 의견이 다르더라도 무슨 일을 추진하든 최선을 다하고 책임지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고 이런 모습들이 회원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강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으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자기희생을 감수한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가진 최대의 에너지요 장점이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일을 벗어 던져버리거나 끝내 타협하고 화합하는데 서투른 사람들이었다면 그간 그러한 일들 어느 것도 해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찬수 사무국장의 정책도 서서히 좋은 반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많은 회원들이 서로 친밀감을 갖게 되고 협회에 대하여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한국 RP 협회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성장을 하고 외부에서 볼 때는 상당히 내실있고 튼튼한 협회로 보여지게 되고 다른 환우회들에게는 자조회로서는 본받을 만한 하나의 잘 성장해 가는 모델케이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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