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 RP 협회와 함께 한 4년(1)
    바다의별 2004/08/16 972
      저는 이제부터 제가 그간 RP협회와 함께 했던 시간동안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담담한 심정으로 써내려 가려 합니다. 조금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지 모르겠지만......이젠 몇몇 개인이 아닌 회원 모두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시작> 2000년 2월 19일은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내가 RP라는 병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거든요. 2개월여에 걸친 정밀 검사 끝에 최종적으로 RP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병에 대한 의사의 설명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저의 가슴에 비수로 박혔습니다. “ 망막색소변성입니다. 점점 시야가 좁아지다가 어느 날 침잠의 세계로 빠질 겁니다. 아직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그냥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세요”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세상이 온통 굴절되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불면의 나날들... 그리고 아무 때나 넘쳐 버리는 눈물샘... 갑자기 멍해지면서 온갖 상상에 빠지는 습관들.. 혼동된 감정.... 3개월간의 불면증은 저의 온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겪으면서 인터넷에서 아주 어렵사리 찾아낸 오아시스는 조재선씨가 만든 홈페이지였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단순한 카페차원이 아닌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많은 자료들을 담은 홈페이지. 20명도 채 안되는 사람들이 가끔씩 글도 올리고 이야기도 나누고 있었지요. 주로 10대에서 30대까지의 인터넷 세대들이었죠. 그리고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천안으로 조재선씨를 만나러 갔습니다. 내가 최초로 본 RP환우였죠. 그 후로 인터넷 홈페이지에서의 우리의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2001년 1월이 저물어갈 무렵 우리는 드디어 인터넷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최초의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사동 찻집... 우리는 서로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좀 시끄러운 축에 속했을 정도였으니... 우울함, 그리고 간간히 터져오는 웃음... 그리고 가끔씩 흐르는 어색한 침묵... 고민의 시간이 길어 자기 나이보다 더 들어보이는 나보다 어린 후배들... 얼굴에 스며있는 표정들에서 그들의 힘든 시간들이 투영되어 보였습니다. 요즘 우리 환우들이 만나면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표정입니다. 환한 표정, 커진 목소리, 밝은 웃음... 우리 RP 협회는 환우들의 웃음을 찾아 준 역할도 톡톡히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누군가가 컵을 깨뜨리거나 장식용화분을 넘어뜨리는 실수를 했지만 거리낌 없이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실수를 우리는 일명 ‘RP개그’라고 불렀지요. 우리 중 몇 명이 계속 조재선씨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은 그 만남이 있은 후였죠. ‘협회’를 만들자는 것이었죠. 그 이름이 어떠한 것이든... 어디가서 상담조차 받을 수 없고 병원에 가서는 병명만 고작 알아 오고 아무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고... 그저 답답하고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RP의 존재조차 이해하지 못해 군대까지 가서 고생한 후배, 가족마저도 이해해주지 않아 서러운 소녀, 외줄타기 하듯 실수를 해가면서 직장생활을 힘겹게 하고 있는 가장.. 그게 우리 모습이었으니까요.. 아주 간단한 것부터라도 우리가 먼저 하자... 그럼 우리의 뒷사람들은 우리보다는 덜 막막할 것이 아닌가.... 그것을 우리가 하자. 이런 고통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자. 숨지 말자. 숨기지도 말자. 우리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당당히 살수 있는 내성을 기르자.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한다. 3월 25일 드디어 협회를 발족했습니다. 그간 조재선씨가 뛰어다니면서 친분을 맺던 몇 분이 합류하셨습니다. ‘그런 것 절대 만들지 마라 나중엔 상처투성이의 가슴만 안고 떠나게 된다. 일의 힘듦 때문보다는 사람이 힘들게 할 것이다.’ 여러 경험있는 선배님들이 이렇게 만류를 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되어 주셨던 분은 현재 감사로 계시는 강일선 선생님과 안상님 선생님 이셨고 남혜운 회장님이 어렵사리 회장을 맡아 주셨으며 조재선씨가 사무국장직을 맡았고 저는 상담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우리 협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몇만원에서부터 몇십만원까지 자기 성의껏 돈을 내어 우리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인원이 몇 안 되었지만 4월 대전지부를 결성하고 이어 대구경북지부를 결성했습니다. 5월에는 처음으로 RP환우들의 소풍이 있었고 이 때 한찬수씨가 소풍에 참여하였다가 후에 협회 일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소식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무심한 병원에 우리의 사연을 담은 편지까지 써서 소식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쓰레기통에 버려질지언정 단 한군데의 병원에서라도 이것을 보아 준다면 적어도 그 병원에 온 환자 중 우리와 같은 환자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줄 것이 아닌가... 6월에 소식지를 발행하여 각 병원에 배포하였습니다. 흑백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소식지였으나 그 내용에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담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의 자료들을 가져와 번역하는 일, 대외적으로 우리를 홍보하는 일부터 소식지를 접고 우표를 붙이는 일과 같이 자잘한 일들이 조재선씨와 몇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고 사실상 직책에 상관없이 주된 몇사람이 이것저것 형편대로 일을 하였지요. 재선씨는 여기 저기 발품을 팔면서 우리를 알릴만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뛰어다녔고 그런가운데 한국희귀질환 연맹의 김현주 교수님과도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간 간간히 신문 등을 통한 홍보활동도 있어왔구요. 우리를 알리는 일, 누군가를 만나는 일, 모두가 돈이 들어가는 일 뿐이었으나 다들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일을 했습니다. 만나거나 회의를 하거나 사무실도 없이 하려니 찻집을 찾아야 했고 밥도 먹어야 했고 교통비 등 알게 모르게 직업이 없는 젊은이들에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온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관심이 있다면 우리 협회소개란의 연혁을 참고 하신다면 참으로 짧은 기간동안 얼마나 줄기차게 달려왔는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