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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P 협회와 함께 한 4년(2)
    바다의별 2004/08/17 860
      <그 해 겨울> 몇 명이서 열과 성을 다하여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협회 일을 하려다 보니 크고 작은 마찰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에 참여하고 싶으나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은 그게 불만이었고 아직 어린 사람들만 있었기에 현실과 이상에서 오는 차이를 극복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일을 하려면 사무실이 있어야지. 사무실 없이 어떻게 일을 해” “지금 돈이 없잖아. ” “초기에 각출한 돈으로 얻으면 되지.” “몇백만원으로 무슨 사무실을 얻지? 어떻게 무리해서 얻는다해도 관리비나 월세는 어떻게 하고...” ...... “돈 있는 사람들 보고 내라고 하면 안 될까?” “우리가 누군지도, 뭐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는데 누가 돈을 주니?” “왜 몇 명만 일하지? 나도 뭔가 하고 싶어.” “그럼 이런 일 해볼래?” “그건 나 할 줄 몰라” “그럼 이 일 해 줄 수 있겠니?” “그건 어려워 못해” “그럼 무엇을 하고 싶은데...” ..... 가끔 이런 식의 대화가 계속 반복될 정도로 아직 현실 감각이 없는 어린 친구들의 갈등은 계속 있었고 고만고만한 또래들의 경우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어서 서로 힘들어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딪치면서도 이들은 많은 일들을 했고 협회에 대한 애착도 깊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했고 열정이 있었고 능력이 되든 안 되는 뭐든지 하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습니다. 그해 10월.. 사무국장이던 조재선씨가 뉴질랜드로 떠나게 됩니다. 그간 크고 작은 갈등과 여러 가지 개인적인 스트레스 등으로 늘 힘들어했었고 부모입장에서 볼 때 결혼도 취직도 안하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좋을 리 없었기에 계속 극심한 반대에 시달렸고 이러한 힘든 상황을 되돌아 보기 위한 나름대로의 시간이 필요한 듯 했습니다. 난데 없이 저에게 사무국장 대행이라는 직분이 떨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해 11월에는 수도권 모임이 결성되었고 처음으로 40대가 넘은 분들이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아주대 병원 김현주 교수님이 전화를 주셨는데 RP라는 병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방송출연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곤란함을 표현했으나 계속된 설득에 협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구나.. 우리가 그토록 애써 소식지 보내는 것보다 몇 배 더 좋은 결과가 올 수도 있다. 이 일로 인해 생길 여러 가지 일들도 생각해 보았는데 저 개인에게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았으나 해 봄직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회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방송에 출연할 사람은 알려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연락이 없었고 시간은 흘렀습니다. 방송을 하겠다고 연락을 해온 친구도 있었으나 방송국에서 판단하여 스토리가 엮어 질 것 같지 않으면 그쪽에서 거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였는데 워낙 알려진 프로이다 보니 워낙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 일이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뜨겁게 달군 논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나이가 드신 분들을 중심으로 방송출연 절대 반대 입장의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방송에 나와보았자 당장 얻는 게 무엇이냐. 아직 세상은 이 병을 모르는데 굳이 알려서 좋을 게 무엇이냐. 이 병이 유전이라고 알려지면 자식 혼사에도 지장 있다. 아니 이런 협회를 만든 게 RP를 세상에 꺼내놓자는 취지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부정적인가. 아직 국내에는 RP 실태조사조차 안되어 있는데 이런 일을 통하여 사회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꿔나가야 하지 않을까. 방송은 이런 희귀병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대책과 관심을 촉구하는 쪽으로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취지를 이미 이해한 터였기에 방송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얼마만큼의 만족을 줄지는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장 얻을 게 없을지 몰라도 협회를 만든 취지가 바로 이런 것인데 이렇게 심한 반대를 하다니... 그러다가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에게 촬영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자이크하고 음성변조해서 출연하라는 것이었죠. 그 자체로도 효과는 있다고... 당시 대구지부장이었던 수민과 저, 당시 뉴질랜드에 있던 재선이 취재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홈페이지는 몇 안되는 회원간에 더욱 찬반논쟁으로 뜨거워졌는데 방송 출연을 하기도 전에 지칠 지경이었고 전화가 여기저기서 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전화를 해서 저에게 협박을 하는 사람까지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나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지? 그 때 제가 용기를 준 사람이 바로 한찬수씨와 김만성 전 사무국장 이었습니다. 절대 마음 굽히지 말라는 이야기와 함께... 사무국장도 없이 저 혼자 시달리고 있을 무렵 한찬수씨가 드디어 유명무실했던 정책실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방송출연을 협회 공식 입장으로 공지하면서 일은 진행되게 되었고 이어서 남혜운 회장님이나 두 감사님도 격려를 해주셨지만 역시 우려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방송을 출연하는 조건으로 담당PD에게 세 가지를 요청하였습니다. 첫째, 우리 RP 협회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안과의사를 소개해 달라 둘째, 망막색소변성이 유전이라는 말을 방송 어디에도 넣지 말라. 셋째, 취재를 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연구상황이 있다면 자료를 구해 달라. 넷째, 보건복지부장관이나 그 관계자와 미팅 후 우리와의 대화채널을 만들어 줄수 있는가. 그리고 방송촬영은 진행이 되었고 12월 드디어 우리의 생소한 병명이 전파를 탔습니다. 방송이 끝나자 마자 홈페이지 접속수가 갑자기 늘기 시작했고 방송을 보고 상담전화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상담전화가 늘자 직장생활을 하면서 오는 전화를 다 받을 수 없었고 이 때 자원봉사자가 나타났는데 그 분이 바로 GG 님 입니다. 방송은 다행히 긍정적 반응이 많았고 약속대로 유전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환우들도 안도의 숨을 쉬는 듯 했으나 역시 어디나 비판자는 있듯이 좋지 않은 글들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방송을 하고나서 회원수는 당분간 갑자기 증가하였으나 우리가 찾던 자문의사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상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의학적인 부분들에 있어서 난해한 것들이 많았고 또한 의사도 아닌 사람이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역시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료실의 그 많은 자료들을 몇 번씩 읽고 또 읽으면서 그에 대한 지식들 중 나름대로 옥석을 가릴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재선의 말로는 자신과 안면이 있는 의사 분들도 자문의사는 꺼린다고 했었고 방송국에서도 당시 취재한 의사들에게 부탁을 했으나 거절을 하더라며 미안하다는 말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얻은 것이 있다면 국내에서도 인공망막연구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이 시작단계에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럴수가!! 우리나라에도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방송을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이 상황에 따라 놀라울 정도로 이리저리 입장이 바뀌는 사람도 있고 한결같이 심지가 굳은 사람도 있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 이상하게 힘을 빼는 일만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고 이 중 가장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값진 선물이었습니다.